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힘러 (문단 편집) === [[나치당]] 내에서의 위치 === 나치당 내에서 초창기에는 듣보잡으로 그레고르 슈트라서에게 잘린 이후 친위대에 들어갈 때까지는 학력만 좀 있는 그저 그런 당원이었다. 그리고 1934년 6월 30일의 [[장검의 밤]] 이후가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1936년 국가경무총장으로 임명된 직후 히틀러에 반하는 반체제 인사들을 구속시키고 감찰하는데 경찰과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고 주장하며 효율성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게슈타포]], 사법경찰, [[질서경찰]] 등의 거의 모든 경찰 조직을 친위대에 귀속시키고 1939년에는 국가민족회 의장까지 겸임했다.[* 나치 독일의 순수 민족화와 민간 행정 지원 및 나치식 국민화를 추진하는 특별 행정기관이다. '''국가 민족대책 전권위원'''이라고도 불려진다.] 모든 독재 정권에서 중요시하는 비밀경찰은 1936년 하인리히 힘러의 휘하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힘러는 나치 독일의 첩보 및 치안을 전부 책임지는 실세 중의 실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힘러가 개인적으로 동경하고 늘 가지고 싶어했던 것은 참모총장 및 군사령관의 직책이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가 친위대를 군대로 키워주고 공인해주기를 간절히 소원했지만, 돌격대의 선례를 두려워한 히틀러는 이를 끝내 거부했다. 군사 조직 개편, 무장화, 소속 군수공장 육성 및 친위대 부설 사관학교 설립도 탐탁치 않아했다. 그러나 1942년에 동부 전선이 확대되자 힘러는 히틀러의 묵인 아래에 [[무장친위대]]를 38개 사단으로 구성된, 국방군에 준하는 거대 무장 조직으로 성장시켰다. 1944년에 예비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는 괴링과 마찬가지로 군권과 정권 모두를 지니게 되었다. 1945년 전쟁 말기까지 지닌 직책은 [[슈츠슈타펠]]과 경찰의 최고 수장은 물론, 내무부 장관, 국가민족회 의장, 국민돌격대 지도자 겸 향토방위군 사령관이었다. 자연스레 그는 [[헤르만 괴링]]과 함께 히틀러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실제 히틀러의 후계자가 된 [[카를 되니츠]] 제독도 처음에는 하인리히 힘러가 퓌러직을 계승할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당 그리고 정부에서 공식적인 2인자는 [[헤르만 괴링]][* 일찍이 히틀러에게 후계자로 책봉받고 1939년 법령으로 차기 퓌러로 확정되었다.]이었고 3인자는 '퓌러의 대리인'[*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하고 당사가 뮌헨에 있었기 때문에 대리인으로 삼았다.] [[루돌프 헤스]]였다.[* 단, 헤스 본인은 권력을 행사했던 적이 없다. 애초에 히틀러도 이 인간은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하여 허울 좋은 자리를 주었을 뿐이다. 실제로 법적으로 퓌러 계승을 확답받은 괴링에게 언질한 바로는 헤스에게 권력이 가는 일은 없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숙청하여도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 괴벨스는 히틀러와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로 서로 깊이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하고, 마르틴 보어만은 개인 비서를 넘어서 헤스가 실각하고 나서는 히틀러를 막후에서 거의 조종하다시피 하는 인물로 전쟁 후기에는 괴벨스와 힘러, 괴링, [[알베르트 슈페어]]가 보어만에 맞선 4인 동맹을 맺었어도 보어만을 꺾기 어려웠을 정도로 보어만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과 권력은 막강했다. 일부 학자들이 보어만이 전시 중에 실질적 퓌러 역할을 했다고 보기도 할 만큼 그의 권력은 독보적이었다.]보다 히틀러에게 신임을 받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상술하였듯 보어만에겐 약점 잡혀서 깨갱거리는 신세였고 괴링의 영역이었던 공군에는 친위대의 손길을 뻗으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괴링의 세력이 큰 것도 이유이지만 둘이 서로 매우 친한 관계였다. 힘러는 괴링을 선배님이라고 극존칭하며 깍듯이 대했고,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괴링도 힘러에게 만큼은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민감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쟁 후 친위대가 덩치를 키워가며 거대한 조직으로 커갔지만 심지어 [[무장친위대]] 장교들도 힘러를 대놓고 무시했고[* 당장 [[파울 하우서]]의 제2SS기갑사단, 일명 다스 라이히 사단은 나치당에만 충성하였으며, [[요제프 디트리히]]의 제1SS기갑사단, 일명 경호대 SS 아돌프 히틀러(LSSAH) 사단 또한 히틀러 개인에게만 충성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인리히 힘러를 따른 무장친위대는 전쟁 후반기에 급조된 부대나 [[아인자츠그루펜]] 같이 무장친위대 내에서도 따돌림 받던 또라이들을 제외하면 전무하였다.] 친위대 보안대(SD)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또한 힘러보다 유능한 인물로 딴 주머니를 찼으며, 그의 후임자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역시 힘러를 견제하였으니 친위대 권력이 온전히 그의 수하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친위대가 나치 독일에서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세하듯이 친위대 내에서도 무장친위대니, 보안대니, 게슈타포니, 인종국이니 하는 조직들이 모래알처럼 '친위대 내의 친위대'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1945년 1월 국방군 장군들이 자신의 뒤통수만 친다고 굳게 믿던 [[히틀러]]가 일개 '''사관후보생''' 출신 하인리히 힘러를 베를린 코 앞의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두어 달 만에 히틀러조차도 친애하는 힘러의 무능함을 순순히 인정, 시원하게 그를 경질하면서 힘러와 히틀러의 관계도 멀어진다. 사실 이전부터 전황이 망해가면서 저 혼자 살려고 아웅다웅했었고 연합국에 히틀러 뒤통수를 치려고 비밀접촉도 시도했지만 연합국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히틀러, 힘러, 괴벨스 등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용만 당한다. 힘러가 접촉을 여러 번 시도한 걸 통해 밝혀진 바로는 연합국에서 파악한 자신의 죄상을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죄로 봤고, 나치당 내에서 서열도 떨어지니 새로운 주인을 만나 친위대 전력을 그대로 조공으로 바치며 충성을 맹세하면 살아남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